
천락 127년. 모종의 이유로, 천 년간 동서남북을 다스리던 사신(四神)이 한꺼번에 부패했음. 하늘의 문은 닫혔고, 썩은 영기 '탁영'이 대지로 거꾸로 흘러내렸음. 사람들은 그 해를 천락 원년으로 삼아 새로 해를 셈.
탁영에 잠긴 짐승은 원한이 뒤엉켜 '원수(怨獸)'가 됨. 사신이 썩어 내린 동쪽 청린지, 서쪽 백아지, 남쪽 주안지, 북쪽 현명지 네 곳은 지금도 들어가면 살아 나올지 장담할 수 없는 금역임. 흔적지에서 멀어질수록 탁영은 옅어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음.
127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원수를 재해가 아니라 날씨처럼 여기며 삶. 고을마다 장이 서고, 변경촌은 부적과 간이 결계로 버팀. 짐승이 자취를 감추거나 물맛이 쓰게 변하면 사람들은 문을 일찍 닫음.
그 틈에서 소속 없이 원수와 탁영을 처리하고 돈을 받는 자들이 생겨났음. 사람들은 이들을 '독행사(獨行士)'라고 부름. 저잣거리 방(榜)에 붙은 의뢰 하나가 국밥값이 되기도 하고, 목숨값이 되기도 함.
밤새 산허리를 타고 내려온 축축한 안개가 저잣거리의 묵은 흙바닥을 짓이기고 있었다. 아직 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아침 공기 사이로, 고을 한복판에 우두커니 박힌 거대한 방(榜) 목판에는 눅눅한 습기를 머금고 끄트머리가 둥글게 말려 올라간 의뢰지들이 빼곡했다. 빗물에 절반쯤 먹이 번진 글자들 위로, 며칠 전 누군가 칼끝으로 깊게 파놓은 원수의 수배선만이 흉물스러운 흉터처럼 선명했다.
목판 구석, 칠이 반쯤 벗겨진 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던 소년이 어깨에 얹어둔 칼집을 툭 하고 고쳐 맸다. 정수리 부근에서 흑색, 백색, 적색의 삼색 털처럼 제멋대로 뻗친 머리칼과 그 아래로 축 늘어진 긴 백발에 차가운 아침 이슬방울이 알알이 맺혀 있었다. 얼굴 가득 박힌 주근깨와 덜 깬 듯 뻐끔거리는 청록색 눈동자가, 판자 앞에 서서 주머니 사정을 가늠하던 상대를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손가락 관절마다 붉게 튼 흉터를 긁적이며 그가 입을 뗐다.
무진 | "어이, 신참. 그렇게 멍청하게 서서 종이 뚫어져라 노려본다고 환(環)이 굴러떨어지냐? 거 칼자루 쥔 손 꼬락서니 보니까 오늘 아침에 막 고을 문 통과한 모양인데."
그는 턱 끝으로 목판 하단에 덜렁거리며 붙어 있는 누런 종이 하나를 가리켰다. [변경촌 인근 가축 연쇄 살상 — 하급 원수 둘. 보수 60,000환. ※단독 접수 불가, 최소 2인 이상 동행]. 갓 독행사 패를 받아 든 놈들이 목숨값치고는 헐값이라며 침을 뱉고 지나갈 만한, 하지만 빈속을 채우기엔 더없이 절박한 잡일이었다.
무진 | "보다시피 저건 짝패 없으면 관아 놈들이 거들떠도 안 봐. 반 가르면 삼만 환이야. 국밥에 조짚술 한 사발 말아먹고 여관 툇마루에서 하루 몸 뉘이기엔 딱 떨어지는 돈이지. 싫음 말고. 굶어 죽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니까."
그의 퉁명스러운 투덜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 안개 너머 서늘한 쇠 냄새와 함께 바닥을 디디는 묵직하고 반듯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짙은 남색 무복에 소매를 단단히 여며 맨 가죽 토시, 그리고 허리춤에 칼자루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갈하게 매달고 있는 검객 하나가 목판 세 걸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눈가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흉터 아래의 흑안이 무진과 상대를 향해 매섭게 꽂혔다.
서랑 | "아침부터 장터바닥에서 시건방진 잡담이나 늘어놓으며 시간 죽일 셈이야? 보아하니 둘 다 제대로 된 합(合)을 맞춰본 적도 없어 보이는데."
서랑은 둘 사이에 일말의 온기도 섞이지 않은 냉랭한 시선을 던지며 제 칼집을 가볍게 툭 건드렸다. 마른 먹물 냄새가 칼바람처럼 주변을 훑고 지나갔다.
서랑 | "죽기 싫다면 발밑이나 조심해. 하급이라 한들 원수는 원수야. 어설픈 각오로 나섰다간 시체도 못 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