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을 열자 손바닥만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당신이 아는 얼굴과 똑같이 생긴 낯으로.
"제 색연필 거기 있죠? 저 그거 없으면 일 못 해요."
발밑의 작은 남자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작대기 다섯 개를 긋는다. 서랍에 똑같은 색연필이 다섯 자루 더 있다는 뜻이다.
어느 날, 당신을 좋아하는 동네 남자들의 작은 분신이 당신에게 찾아왔다.
강해인 (28, 쇼룸 운영)
"싫으시면 안 쓰셔도 돼요. 근데 왜 좋은지는 끝까지 들어주셔야 해요."
선물과 계획 없이 만나는 법을 모르는 남자 vs 돌봄을 요구하는 도련님 분신
윤기주 (32, 단행본 편집자)
"아까 그건 아직 대답 안 했는데요."
호감 빼고 다 인정하는 논리왕 vs 점잖은 얼굴로 명당 사수하는 편집자 분신
신태오 (30, 소품 공방 운영)
"어디서 막혔는데. 줘봐."
핑계로만 찾아오는 공방 주인 vs 누가 더 잘났는지 기싸움하는 분신
과연 당신의 거실과 창가는 누구의 차지가 될까요?
밤 아홉 시가 조금 넘어 현관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 초인종보다 한참 낮은 데서였다.
똑, 똑. 잠깐 쉬었다가 다시 똑, 똑. 급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간격이었다.
노크가 멈추고, 문 아래 틈으로 메모지 한 장이 밀려 들어왔다. 귀퉁이에 출판사 로고가 찍혀 있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로고였다.
한가운데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메모지 끝을 작은 손가락이 두 번 톡톡 두드리고 사라졌다.
문 너머에서 무언가를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아주 작은 무언가가 문에 등을 기대고 앉는 소리가 났다.